​[젠더]

모든 종류의 성별 지칭으로 불리는 것을 지양하려 하는 편.

 

[그 외]

겉으로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법. 그러므로 그의 껍데기를 가장 먼저 서술한다.

 

전: 예의상이라도 조리 흉내를 내거나 그릇에 담지 않으면 취식을 마다하는 입, 대단히 잘 관리된 골동품 같은 파이프를 가끔 물고 있기도.

후: 봇짐처럼 보이는 가방 하나를 한 쪽 어깨에 메고 다니며, 그 안에는 깨지지 않게 차곡차곡 채워 넣은 다기가 들어 있다. 찻잔의 종류는 사기그릇부터 유리까지 다양한데, 고르고 골라 다섯 잔 정도라고. 도대체 봇짐 한 번 내던지면 다 깨질 것을 왜 가지고 다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용케도 잘 간수하는데다 필요할 때 고상한 티타임을 알차게 가지곤 한다.

좌: 활을 매고 다니는 가죽 활집을 왼쪽에 치우쳐 차고 있다.

우: 오른손잡이. 손에서도 늘상 향유 냄새가 난다. 쥐는 화살이 액체인 탓에 손수건을 자주 사용한다.

 

하는 짓거리며 과할 정도로 단장된 겉모습을 보고 그의 옛날을 쉽사리 연상할 수 있는 사람은 잘 없다.

 

당신은 아래의 이명 중 하나로 그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뭍으로 돌아온’, ‘영광된 누미디아 전투의 아처’, ‘불신자’ 사지.

 

가장 가까웠던 시절부터 차례차례 되짚어 보자.

 

[불신자]

그는 명실상부 ‘불신자’다. 타인의 신앙에 대해 악랄한 질문 던지기를 즐겨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트집 같은 질문들에 상대가 불쾌감을 내비쳐도 쉽사리 관두지 않는다. 그 기저에 ‘신앙’ 자체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떤 신의 신자든 상관없이 괴롭혀대곤 했으니까. 악취미도 정도가 있는지―혹은 이게 더 정도가 심한 것일지 모르지만―저 혼자 조잘대는 것보다는 굳이 상대의 대답을 상대의 입으로 듣고자 한다. 그러니까, 상호작용을 바라는 것이다! 정성스럽기도 하지.

 

그가 원래부터 불신자였냐고 하면, 그건 아닐 터다. 사지는 30년 전 ‘영광된 누미디아 전투’에서는 적어도 대단한 에흐게니아의 추종자였다. 그 전투에서 생환한 이들 중에 사지를 아는 지인이 몇십 년이 흘러 이 소식을 전해주기는 드물 것이고, 그래서 대부분 풍문으로 접하는 사실은 이렇다: 승전보를 듣고 난 후, 본래 성역으로 향해 결속을 맺으려던 그는 돌연 불신자가 되었다. 이후로 잠적, 30년이 흘러 지금이다.

 

무언가를 본 걸까? 느낀 바가 있던 걸까? 혹여 열렬히 바라던 결속을 받지 못한 탓에 신에게 완전히 실망한 걸까? 누구도 그의 본의를 몰랐고, 그 역시도 함구했다.

 

 

[영광된 누미디아 전투의 아처]

알프의 서부 끝, 죽음의 경계 가까이에 누미디아라는 넓디넓은 설원이 있다. 내막은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당시 최고의 채굴지였던 누미디아 광산 앞으로 차곡차곡 경계를 넘어온 마수가 우글거리게 된 일이 있었다. 단순한 사냥으로도, 몰이로도, 정공법으로도 상대하기 쉽지 않은 알프의 겨울,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설원. 영광된 전투라고 불리기 충분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사지가 뜬금없이 거기 왜 있었느냐 하면, 드넓은 설원을 효율적으로 공략할 기마병으로서는 칼리움의 용병이 적임이었기 때문이다. 어찌할 바를 모를 드넓은 평원에서 실마리가 조금은 보이는 듯도 했다.

 

칼리움의 기마병 중에서도 그는 치유의 신성을 사용하는 군의였으므로, 단연 눈에 띌 만했다. 당시에는 다른 이름을 썼으며, 지금 같은 ‘고상함에 대한 집착'이 없었으므로 겉모습까지도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할 수 있겠다. 높게 올려 묶은 말총머리, 단단한 신체, 누구보다도 맑은 눈동자. 전략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이는 아니었으나, 쉴새없이 전장을 누비며 전사들의 기세를 북돋우고 사망자의 산에도 뛰어들어 신성을 퍼부을 정도였다. 또한 신실하고, 생명을 구호하는 데 필사적이었으며, 정의로운데다 인망이 두텁기까지…… 이런 이야기는, 그때는 그 지독한 비아냥질을 한 번도 안 했단 말이야? 의심스러워하는 이들의 의심만 더 깊어갈 풍문이었다.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누미디아 지역은 이후 광산과 함께 번성했으며, 이것이 아르콥스의 영광임을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뭍으로 돌아온]

마지막으로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태어났을 때를 회고해 보자. ……너무 오래 전이라 잘 기억이 안 날 테니, 가장 강렬한 기억만 몇 개 되짚어 보도록 한다.

 

주변은 단란했다. 물에 빠진 적이 있다. 왜소하고 조그마했다. 부족의 이름은 세멜레. 오아시스 대신 바닷가에 접해 있었다. 끊임없이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기병을 자주 배출한다. 부족 전원은 말을 친구처럼 여겼다. 또한 부족은 신실한 에흐게니아의 신자였는데, 그 중 두 사람만 아르콥스의 사랑을 받고 태어났던 기억이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의 부족 사람들 중 현재까지 연락이 닿는 사람은 그 둘 뿐이다.) 그 탓에 이른 나이에 알프를 몇 번 방문하였고, 어느새 칼리움에서 온 용병으로서 알프에 가게 되었다. 왜소하던 그는 금방 훌쩍 컸다. 세멜레 사람들은 그를 ‘뭍으로 돌아온’ 녀석이라고 놀렸다. 이전의 가는 팔다리가 물미역 같았다 하면서, 비로소 땅에 발붙이고 나니 튼튼해졌다고. 사지는 이 얘기를 재미있는 농담처럼 자주 언급한다. 술자리의 단골 화제라도 되는 양…….

 

아차, 너무 오랜 옛 시절로 회귀하는 것은 관두자. 우리는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의 ‘아처’ 사지만 기억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