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익히 알고있던 헬리오스 블랙의 이야기는 생략한다.
그는 여전히 페르마타 호 위에서 태어난 행운이기도, 붉은 머리가 불러일으킨 불행이기도 했으며
페르마타 호와 페르마타 상단의 차기 주인임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그가 과거로 되돌아온 이후의 변화만을 서술한다.
<그 날을 기억한다.>
리시르 4991년 7월의 어느 날. 헤몬의 항구 도시 리하티로 회항중이던 페르마타 호의 갑판 위. 따사로운 햇빛 아래 한껏 단잠을 자던 붉은 머리 소년이 새 숨을 내뱉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계로 돌아왔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다시금 스스로에 대한 인지를 달리 한 것이 고작 열 살이었다. 잠에서 깬 순간부터 평화로웠던 바다는 온데간데 없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폭풍우였다.
··· 이 모든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론적으로 그 날 이후 정확히 5년 뒤, 페르마타 호는, 헬리오스 블랙은 아버지이자 선장 에이비스 블랙을 잃었다.
<리하티의 붉은 머리>
리하티는 여전히 랄파다에게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한 온갖 미신들이 성행했다. 다만 세상이 흉흉해지니 사람들 또한 날카로워졌다. 본래 ‘사도’를 보아도 별 신경 쓰지 않던 이들은 이들은 신의 사랑을 받지 못 한 불신자를 향해 스스럼없이 따가운 눈초리를 보내곤했다. 파도가 높고 날씨가 궂은 날이면 어김없이 이 모든 것이 불신자 탓이라며 욕하기 바빴다. 그런 와중에 리하티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페르마타 상단의 상단주 에이비스 블랙까지 사망하자 불신자에대한 배척은 나날이 심해져갔다. 그리고, ‘붉은 머리의 블랙’이 리하티를 거닐었다. 그에게 따라붙는 시선이 어땠을지는 불 보듯 뻔하지 않겠는가? 그가 아직 불신자임이 밝혀지지도 않은 시점이었음에도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 붉은 머리가 기어이 배에 불행을 불러 일으켰다고!
<페르마타>
에이비스 블랙은 헬리오스 블랙이 회귀 전의 기억을 되찾은 순간부터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영이 신의 곁으로 되돌아갈 날이 머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단 소리다. 헬리오스는 성인이 되려면 아직 멀었고, 그렇다고 그가 다 자랄 때까지 자신의 생이 이어질 것이라고도 장담하지 못 했다. 그때부터 상단을 외동 자식에게 물려주기위한 밑작업이 시작되었다. 그의 시신이 작은 배와 함께 바다 위에서 불탈 때, 유언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하나, 친자 헬리오스 블랙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내 에밀리 S.블랙에게 페르마타 상단의 상단주 자리를 위임한다.
둘, 나의 친우이자 페르마타 호의 현 부선장 잭 퍼거슨에게 페르마타호의 항해 권한을 일시적 일임한다.
셋, 위에서 언급한 둘의 권한은 헬리오스 블랙이 성인이 되는 해의 첫 날까지. 이후 상단과 상선의 소유 권한은 모두 헬리오스 블랙에게로··· (생략)
그러나 현재 리시르 5024년 현재까지도 에이비스 블랙의 유언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페르마타 상단과 페르마타 호는 여전히 에밀리 S. 블랙과 잭 퍼거슨의 손에 있다.
<결속>
가능할 리 없었다. 페르마타 호 위에서 눈을 뜬 날 신의 사랑은 헬리오스를 떠나갔다. 더이상 랄파다도, 아르콥스도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 과거 17세에 신과의 결속을 위해 성역을 올랐을 때와 같은 날짜, 같은 시간에, 그는 제 목 뒤에 있는 낙인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성역에 올랐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그 어떤 신과의 결속도 맺지 못 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신성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사도(邪道astray)가 따로 없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떳떳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나 붉은 머리라고 은근히 저를 배척하는 동네에서 ‘불신자’라는 것까지 들킨다라, 이 무슨 끔찍한 소리인가? 그는 임시 방편으로 마법을 이용해 낙인을 가린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잔느 家>
헬리오스 블랙. 헬리오스 잔느 블랙.
이번 생의 헬리오스의 이름 사이에 자리잡은 이름 ‘잔느’.
현재 잔느의 주인은 하르몬디 소메 잔느 백작 부인이며, 그의 옛 부군이 헤몬의 국정 의원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현재, 하르몬디 부인의 짝은 헬리오스의 모친, 에밀리 S.블랙이 차지하게 되었다.
에이비스 블랙이 죽은 이후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헬리오스의 모친 에밀리 S.블랙은 헤몬의 수도에 살고 있는 자신의 오랜 소꿉친구 하르몬디 소메 잔느 백작 부인과 재혼하게 된다. 에흐게니아의 사랑을 받은 것에 비해 몸이 약했던 하르몬디 백작부인은 슬하에 자식 하나 없었으며, 그 역시 일찌감치 부군을 잃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친 에밀리 S.블랙이 재혼함에 따라 헬리오스는 잔느 家의 유일무이한 양자가 되었다. 헬리오스가 18살이 되는 해였다.
<그리하여,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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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르 5020년, 불신자 토벌에 대한 것이 본격적으로 가시화 되기 전까지 꿋꿋하게 정체를 숨긴 채 살아왔다. 노력이 무색하게 불신자인 것도 모자라 ‘사도’이기까지한 것이 드러나자 그는 리하티에서 도망치듯 대륙을 떠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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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거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있다. 여전히 제 집안과 관련된 모든 것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나돌아다녔으며, 이전 생보다 빈번하게 놀음판을 드나들었다. 그러다 사도임이 발각되면 또 다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4년의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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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주인이 불신자인 것도 모자라 사도이기까지 하다니,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페르마타 블랙’의 자손들 (이하, 에이비스 블랙의 형제들)은 상단과 배를 빼앗으려 들었다. 그나마 헬리오스와 에밀리가 잔느의 이름을 등에 업고 있기에 경영권을 방어중인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