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모르는가? 정말로? 사도 브로켄, 자타공인 장르불문 리프난시르 최고의 흉악범이다.
그의 목에만 모든 수배를 합쳐 1만콜이 걸렸더라지.
대형 방화 6건, 절도 10건, 마탑 대외비 자료 유출 50건, 신성모독 30건 이상, 그 중 제일인 것은 ‘성역 방화’라던데-
라르케아 동부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 혹은 헤몬 풍요의 뿔 해협의 군도 중 하나. 둘의 공통점은 불신자 마을. 집 안에서는 매캐한 연기냄새와 함께 불길히 번져 있는 감각이 가득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그대 손에는 따뜻한 차 하나가 들려진다. 눈 앞의 사람은 회상한다. 변화한 세계에 짜 맞춰져 생후 10여년간 간신히 텐션을 유지하고 있던 인과의 고리들은 애초 그의 운명사 위에서는 온전할 수 없었던 것 같다고.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 세계란 얼마나 불합리하고, 짧은 세월 하에서 눈 깜짝 할 사이 잦아드는 아우성은 그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공백을 만들었으며 만들게 되는가. 아카데미 학생회장의 자리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접하면서 원래대로라면 이 세상에 의문이 가득 생겨야 했을 시점에 그는 놀라우리만치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그는 생애 처음으로 의문이 없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날선 기질은 ‘분명 이 시점에 뭔가 있었어야 했다’는 공백을 정확히 짚어냈고 혹여나 이것이 신 때문일까 스스로 의심을 품은 그 때부터 억지로 짜여 맞춰져 있던 판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리시르 4845년, 보니아는 평범히 결속을 맺으러 향했고 그 무엇과도 결속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성역이 불탔다. 통상적으로 ‘불타는 밤’ 또는 ‘브로켄의 성역 방화’라 함은 이 때를 의미한다. 기존 보니아의 결속 시기와 날짜도, 날씨도,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일치한다.
자기 자신과 이 순간에게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마치 존재해서는 안되었던 것 마냥 스러지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열기와 함께 기존 기억 위에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새로운 기억들이 덧입혀 씌워지고 끝내 온전한 자신으로서의 자각을 마쳤을 때, 성역 인근에 위치한 부둣가에서부터 온갖 냉병기를 손에 들고 달려오는 사람들과 뒤따라오는 신관들을 보며 그는 과거와는 달리 지금 이 시간 이 곳에는 그 자신을 책임 질 수 있는 그 어떤 알리바이도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을 했다. 사람들이 다가오는 모습은 결코 생포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회상한다.
그 사건 당시 이후 신관들 사이에서만 도는 소문뿐이긴 하지만, 기억을 되찾던 과정의 보니아가 가장 먼저 뚜렷하게 했던 말은 어딘가 관성적으로 한 말에 가까웠는데, 그 내용이 ‘내 상상으로 모조리 불태우고 싶어’ 였다나 뭐라나. 과장이 다소 섞였겠으나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단순 우발적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가히 라르케아 건국설화 속 거대 뱀 괴수인 ‘브로켄헥세’의 귀환과도 다름 없었다고 한다. 네 발과 날개로 동분서주 뛰어다니다 밤에 해를 물고 와 성역을 불사르고 신이 이에 실망하여 떠나려 하자, 가장 의로운 자가 겨우겨우 땅의 힘을 빌어 그를 세상에 묶어두고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도록 사슬과 함께 엮어 지하 깊숙히 넣어 다시는 빛을 보지 못했다고 전해지는 그 브로켄헥세 말이다. 이제는 왕좌의 받침대 가장 아래에서 장식용으로 사용되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왕의 권위와 동시에 신에게서 버려진 두려움을 상징하게 되었으니, 제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벌겋게 집어 삼키며 끝내는 하늘로 도망가버린 그 사도를 ‘브로켄’이 아니면 무엇이라 부르리.
성역 방화 사건 이후 그는 제 신상을 밝히며 공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는데, 마탑의 인원들은 그의 사도명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리시르 4880년대 이후부터 보니아의 손에 연구자료들이 알음알음 유실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마탑에 들어왔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그가 마탑의 구조에 해박했을 것으로 미루어보아 사도 브로켄이 학자로 위장침투 해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그러하진 않았지만.
이후 마탑뿐만 아니라 신전, 왕궁 등 라르케아-헤몬 전역에서 정보들이 기록된 문서나 물건이 사라졌다. 대부분 사소한 것보다는 성물과 같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목표로 삼을 때가 많았고, 가끔 이런 사고는 자연재해가 아닌가 싶은 사건에도 용의자로 다수 이름이 붙어있다. ‘헤몬 항구 폭파사건’, ‘라르케아 왕실 예식용 검 도난미수 사건’, ‘마탑 도서관 방화사건’, ‘라르케아 남부 대화재’ 등…
그렇게 실제로 입건된 굵직굵직한 사건들만 10개가 넘는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196년간 모든 생을 통틀어 쌓인 그의 전과는 최소 50건 이상. 사라진 자료들의 공통점을 보아하면 과거의 제가 썼을 법한 내용과 유사하거나 혹은 완전히 반대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시르 5020년대. 불신자 토벌령 선포 다음 날 라르케아 신전 제단에 영문을 모를 두꺼운 책이 놓였다. 신전 측에서는 이를 사도의 도발로 받아들였고 리프난시르 전역에 수배를 돌렸다. 목격자에게는 150콜을, 검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된 자에게 5000콜과 라르케아 동부에 위치한 넓은 임야를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용의자에 대한 정보 공개는 일절 없었지만 라르케아의 모두가 이 범죄가 누구의 짓인지 알고 있었다.
‘피카트릭스’, 마법의 기초원리와 근원에 대한 집대성. 신과 마법은 연결되어 있으나 또한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하여 명명백백히 밝혀져 있었다는 이 책의 전문은 사건 이후 왕궁 앞마당에서 불태워지며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읽히지 못하였으나, 그 서문만은 이상하게 세간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상상 혹은 집대성. 그러나 명심컨데 그대 앞에 놓여진 본성을 거부하진 말라.’